“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내가 애국가를 미국에서 듣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한국 국가대표가 등장하는 스포츠 경기도, 한국 TV프로그램도 아닌 코스트코에서 말이다. 연간 회원카드를 만들기 위해 여권을 내자, 우리를 담당하던 파란 눈의 외국인이 갑자기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이게 무슨 일이지?’ 1절로 끝날줄 알았더니 2절, 3절을 연이어 부른다. 4절까지 마친 그에게 박수를 쳐 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직원들과 줄을 서 있던 손님들도 함께 박수를 쳤다. “어떻게 애국가를 알고 있냐”고 묻자 본인은 포크송(folk song)을 듣기를 좋아해, 다른 나라들의 포크송을 찾던 와중에 애국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음과 가사가 아름다워 애국가를 외우기 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내년에는 휴가를 내 직접 한국에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나조차도 가물한 애국가 2절을 가열차게 부르는 외국인을 보며 감개무량했다.
대한민국은 더이상 미국 내에서 ‘멀고먼 동방의 자그마한 나라’가 아니었다. 20여년 전 미국에 잠시 머물렀을 때 외국인들은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을 한 동양여자인 나에게 일본어로 ‘곤니찌와’라며 말을 걸어오곤 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노스코리아’냐고 물었던 기억도 있다. 당시 거주했더 곳이 한인마트가 없는 지역이라 김치나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 늘 한식을 그리워했었다. 한국쌀이 없어 일본 스시라이스를 사 밥을 해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인마트가 지역에 없어도 충분히 한식을 만들어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그렇다고 내가 한국마트에 가지 않는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코스트코에서는 김치와 삼계탕, 김, 한국쌀, 즉석밥, 만두, 한국 라면 등을 상시 판매하고 있다.‘코리안 BBQ소스’를 판매할 뿐 아니라 한국 BBQ 소스 맛 육포도 판다. 떡볶이맛 김 스낵도 미국인과 한국인 모두 좋아하는 코스트코 간식 중 하나다. 미국 내에서 인기가 많은 식료품점 ‘트레이더조’에서도 냉동김밥, 떡볶이, 김, LA갈비, 김치, 불고기 등을 비롯해 각종 한국 음식들을 판매한다. 프리미엄·유기농 제품을 많이 판매하는 것으로 알려진 홀푸드에서도 한국 음식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우리 가족들은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한식을 먹고 있다. 외식 물가가 비싸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는 게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한국 식재료와 음식들을 조달하기가 쉬운 것도 큰 몫을 한다.
지난해 말 ‘오징어게임2’가 나오면서 고학년 아이들 사이에서도 한국 드라마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세이상 관람이 가능한 드라마인데 고학년 아이들이 직접 이 드라마를 본 것인지, 일부 장면만 본 것이지는 모르겠지만 공깃돌을 사 와 학교에서 쉬는시간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공기놀이를 한다. 아마존 등 미국 홈페이지에서는 매우 비싸게 판매하고 있어서, 조금만 오징어게임이 더 일찍 개봉했더라면 아이들 친구들을 위해 공깃돌을 잔뜩 사와 선물로 나눠줄 것을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아이들이 즐겨하는 게임 중 하나가 됐다.
길거리에서는 아이들이 가수 로제의 노래 APT의 가사인 ‘아파트, 아파트’를 흥얼거린다. 이 노래는 댄스파티에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이 노래를 떼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랑스러워 딸에게 “친구들한테 그 노래 한국 가수가 부른거라고, 케이팝이라고 얘기해줘”라고 말했다.
그런데 딸의 대답이 가관이다. “왜 그래야되는데?” 반항의 의미가 아니라 딸아이에게는 미국 친구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돌아온 답이다. 호텔에서도, 마트에서도, 라디오에서도 BTS를 비롯한 한국 가수들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때문에 친구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전혀 아이에게는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아니다.
동네의 웰니스 센터에서도 한국 노래를 틀고 춤을 배우는 케이팝 수업이 상설로 열린다. 참고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한인 타운이 있는 타 지역들처럼 한인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겠다. 케이팝 클래스를 듣는 대상자들은 당연히 한국 사람들이 아니다.
외국 친구들에게 줄 좋은 선물은 한국 화장품이다. SNS 등을 통해 한국 인디브랜드 화장품이 좋다는 소문이 나서, 기초 제품이나 립스틱 등 한국 화장품을 선물하면 너무나도 기쁘게 받는다. 일부 한국 화장품들은 대형 마트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한류열풍의 시대에 미국에 온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미국 내 정착 생활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민을 간 한국 아이가 학교에 김밥을 싸가지고 갔더니 외국 친구들이 김밥에서 나는 냄새가 싫다며 아이를 따돌렸다는 과거의 이야기는 마음이 아프지만 이젠 과거의 역사가 되었다. 우리집 아이들은 삼각김밥을 포함해 김밥을 학교 도시락으로 종종 싸가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가 “너만 매일 맛있는걸 싸오고, 너무 불공평해!(Unfair) 이런건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건데!”라고 외쳤다고 한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한국 언니의 반에는 한국어 열풍이 불어 ‘한국어 교실’이 열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K 컬쳐, K 코스메틱, K 팝’ 등 각종 ‘K’가 붙은 기사를 읽기도 하고 쓰기도 했지만, 미국에 살아보면서 세계속 한국의 저력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뭐만 했다하면 ‘K’를 같다붙이냐는 다소 조롱섞인 시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와보니 알겠다. 정말 ‘K’의 저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말이다.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의 저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더 많이 자랑스러워 해야겠다.
매경250529발췌